운문사 가는 길에는 운문호가 찰랑이며 아름다운 파장을 일으킨다.
운문사 입구 소나무 숲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운문사 소나무 숲길은 속세의 근심을 잊고 욕심을 잊게 만든다.
생물학적인 사람살이는 고작 길어야 100살이 아닌가. 그런데 몇 백 년을 살 것처럼 욕심과 호기를 부리면서 살고 있다.
이 소나무들의 나이는 몇 백 살을 먹었어도 아직 정정하다. 숲 사이로 난 길은 운문사 주차장까지 계속된다. 운문사는 일주문이 없다. 소나무 숲길이 일주문을 대신하는지 모른다.
운문사의 진산인 호거산은 바위산이다. 금강산의 어느 암반을 보는 듯 기이하다.
이곳에 암자가 있다. 북대암이다. 북대암은 제비집처럼 지어져 운문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음을 맑게 하고 절집을 들어선다. 천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던 절(가람)을 들어서니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른쪽에는 키는 작지만 소나무 줄기들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가 마당 면적을 덮고 있다.
500살 된 늙은 소나무는 나무의 속성을 거부하듯 겸손하게
자신의 몸을 감추고 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아야 나무 기둥과 가지를 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드는 소나무는 500년 동안 키는 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게 확보하고 있다. 하늘 향해 키가 자랐으면, 그 풍랑의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땅을 향한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참을 떠날 수 없었다. 이 소나무의 겸손함과 정갈함이 절집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분위기와 건축물이 정갈하고 깔끔하여 나무랄 곳이 없는 절집이다.
주변 환경도 안정적이고 절을 휘돌아 나가는 계곡물도 맑고 시원스럽다.
1,500년 역사의 풍랑 속에서도 살아남은 대가람의 경내를 걷는다. 멀리 운문산이 보이고 가까이 호구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높은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산맥을 만들어 운문사를 보호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산속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존재한 것이 신기하다.
1,200년전 에 운문사는 평지에 지어졌지만 가람을 두르고 있는 산의 보호를 받았다. 동쪽으로는 운문산과 가지산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비슬산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
시를 쓰는 김문숙 목사님과 함께
세속오계를 전수했던 원광법사,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살았다.
원광법사(圓光 541~630)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유명 스님이다.
세속오계를 지었기 때문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진평왕 때, 이 절을 찾아온 화랑인 귀산(貴山)과 추항에게 원광법사가 알려준 다섯 가지 계율에서 비롯되었다.
세속오계는 다음과 같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모시는 일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는 것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
살생유택(殺生有擇) 산 것을 죽임에는 신중 할 것
신라가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이런 계율을 가지고 실천했던
화랑정신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계명은 15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효하다.
보양국사는 운문사의 중창자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밀양의 봉성사에서 시무했다.
후삼국의 싸움판이 치열할 때, 왕건은 청도 인근까지 휘돌아다니며 전쟁을 해야 했다.
그런대 이곳 산적들의 세력이 만만하지 않았다.
산적들은 견성(이서산성)에서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어떻게 하면 산적들을 정복할 수 있는지 방법을 묻는다.
보양국사는 “개는 밤을 지키고 대낮에는 경계를 하지 않으며, 앞을 지키며 뒤를 방어하지 않으니
낮에 뒤쪽을 공격하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왕건은 그가 알려준 방법으로 산적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훗날 왕건은 보양국사가 지금의 운문사인 오갑사를 중창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보양국사는 왕건으로부터 밭 500결(結)과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받는다.
태조 왕건이 운문이란 사액을 사용한 것은 당나라 때 승려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에서 따온 것이다.
운문문언은 당나라의 고승이었다. 그는 “석가모니가 만약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교만한 말을 다시 한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호방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작갑전(鵲岬殿) 문은 닫게 있다. 나는 이곳의 전설을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 올 때 해룡이 청하여 용궁을 구경한다. 이때 금라가사를 한 벌 얻어 입는다. 해룡의 아들 이목에게 보양국사를 안내하여 작갑에 사찰을 창건할 것을 지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곳 지금의 운문사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평지에 어른거리는 5층의 황탑을 발견한다. 그러나 평지에 도착하니 5층황탑은 사라지고 그곳에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은 직감적으로 작갑(鵲岬)이 ‘까치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시 땅을 파니 그곳에는 많은 전돌이 묻혀 있었다. 이 벽돌로 절을 중창하고 작갑사라 하였다. 작갑사는 훗날 태조 왕건이 내린 사액에 의해 운문사가 된다.
결국 운문사는 왕건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절이다. 밭 500결은 당시 청도 농토의 10%가 넘었으니 경제적인 세력을 알만하지 않은가. 이뿐 만이 아니었다. 인종 7년(1129년)에는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예속시켰다.
고려의 어느 사찰보다 크고 부자의 절이 되었지만, 무신정권하의 민란과 노비반란으로 명성을 잃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농민과 천민들의 항쟁은 대단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의 천민항쟁으로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운문사 경내
운문사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의 전형적이 모습이다.
1193년(명종23년) 민중항쟁의 중심 무대는 이곳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깊은 산중이었다. 운문의 김사미와 밀양(초전)의 효심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토호와 사찰을 공격한다. 운문사는 그들의 거점이 되어 고려 조정은 운문사를 운문적이라 했을 정도였다. 이 난을 주도한 인물이 ‘김사미’다.
그는 운문사의 김씨 성을 가진 사미승으로 보는 견해가 역사학회에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민란세력들은 경북 예천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지만 김사미는 개경의 무인정권에게 협상을 요구한다. 고려 조정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편안하게 살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김사미는 항복을 한다. 그러나 토벌작전에 나선 병마사는 김사미를 죽이고 잔여 세력의 소탕에 나선다. 고려 조정에 속은 농민군과 노비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어 10년 이상을 저항한다. 결국 운문산은 고려 민중항쟁의 한과 역사가 서린 산이다.
당시 토벌군에 자원하였던 이규보는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에서 버섯을 따서 구워먹었다”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낸다. 이규보가 누구인가. 고려 최고의 문인이 아니던가. 그가 이곳까지 와서 토벌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니 역사는 무서운 것이다.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문인답지 않은 모습을 운문사에 와서 배운다.
운문사의 담은 낮다.
감싸 안은 담장이 만약 높았다면 운문사는 고약한 절이 되었을 것이다. 운문사가 쌓은 음덕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 숲길은 고려의 유명 인사가 걷던 길이다.
고려농민항쟁이 진압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1277년 이 절에는 한 고승이 주지로 찾아든다.
일연스님이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 운문사 주지로 근무하던 5년 동안에 그는 삼국유사를 완성한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서는 참으로 빈약할 것이다. 그가 가고 왔을 길을
상상해 본다.
일연 스님은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 광명사에서 국존이 되었다가
군위 인각사에서 84세로 열반한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운문사를 부흥시킨 스님은 설송대사(1676~1750)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성은 백씨이다. 법명은 연초(演初) 설송은 호(呼)이다.
1688년에 운문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13세였다. 휴정의 법맥을 이은 스님이다.
훗날 운문사의 재산이 밝혀진 것은 일제의 토지수탈정책에 의한 토지조사에 의해서였다.
절터를 포함한 영역이 약 622만평이었으니 이때까지도 운문사의 재산은 대단했다.
운문산은 평화와 저항의 산이다. 역사의 아련한 기억들을 담아 전하는 비문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진다.
운문사에는 원응국사비(보물316호)가 1000년 가까이 서 있다. 이 비문은 윤언이(~1149)가 썼는데 그는 윤관장군의 아들이다.
그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의 부하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부식에게 잘못 보여 좌천되기도 한다.
고려의 정당문학으로 큰 문장가였다. 글씨는 고려 최고의 명필 탄연(坦然, 1070~1159)이 썼으니 이 비석의 가치는 대단하다.
운문사는 새벽예불이 유명하다. 새벽 예불이 끝날 때는 운문사를 3차에 걸쳐 창건했던
원광법사, 보양국사, 원응국사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운문사는 석탑과 불상 등 7개의 보물이 수두룩하고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의 승가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슬비가 내리는 절집 구경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운문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꽃문살
사찰 창건 설화가 서려 있는 작갑전
작갑전 왼쪽 진달래가 고와서
승방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운 꽃가지
글 : 시인 김경식
사진 : 문학기행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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