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과 구례(상)
사진/ 글 김경식
봄꽃이 피는 계절이다. 가는 곳마다 지천으로 꽃이 피었다.
새순과 잎이 돋아나는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주변 풍경을 새롭게 만든다.
겨울 같은 봄이라고들 하지만 어김없이 봄은 우리 곁에 와 있다.
사계절의 순환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다.
이런 시기에 여행을 떠날 수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특히 역사의 무대에서
스러져간 인물들을 탐구하고 조명하는 답사는 보람까지 느끼게 한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작가들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과 작품의 무대를 답사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국토의 산과 들 강과 골짜기 마다 삶의 숨결을 심어 놓았다.
이 숨결의 씨앗들은 죽었다가 부활하여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하고 때로 슬픈 전설이 되어 구천을 떠돌기도 한다.
역사의 숨결을 듣고 땅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심호흡하면, 역사와 문학은 머리를 맑게 만든다.
그 기운은 가슴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 건강을 지켜준다.
구례 들녘
우리는 때로 찬란한 역사도 있었지만 대체로 고난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답사자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기도 하고 실망도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 국토는 역사에 다 게재하지 못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어디나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역사현장의 이야기들을 모으면 문학이 된다. 그곳을 답사하는 것이 문학기행이다.
금년은 우리 민족의 치욕인 경술국치(1910년)를 당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0년은 우리 민족에게는 고난과 희망의 시기였다. 이번 기행은 만 100년 전에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구례에 살던 선비인 매천 황현이 절명시와 유서를 쓰고 자결한 현장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답사자들은 대부분 우국충정을 온 몸으로 느끼며 나라와 국토사랑을 실천한 매천 황현의 삶과 죽음에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매천 황현이 마지막 삶을 살았던 구례 매천사의 대월헌을 찾아 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다. 결국 이번 답사 기행의 주인공은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매천 황현
봄이라 하지만 겨울 같은 날씨는 며칠 전에는 간간히 눈발도 날렸다. 사월 날씨 치고는 이상기온이다.
구례를 찾아가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빗방울이 떨어졌다. 함양에서 남원으로 이어진 국도 같은 고속도로에 이르니 비로소 비가 그쳤다. 간간히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기도 했다. 남원에서 구례로 이어진 19번 국도는 오히려 고속도로보다 도로상태가 양호하다.
1)지리산과 구례
지리산 노고단을 보면서 달린다. 이곳에서 보면 구례는 지리산 남서쪽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지리산은 ‘산국(山國)’이라 할 만큼 광활하다.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 산청, 함양 등 3도 5개군, 15개면에 걸쳐 있다. 지리산의 둘레만 850리에 달한다.
한라산 영역의 3배나 된다. 이런 거대한 영역을 지닌 지리산에서 어떤 봉우리가 높고 대단하다고 까불 수는 없으리라. 천왕봉(1,915m)을 비롯하여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무려 20여개를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리산은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상징적인 산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등의 소설이 모두 지리산이 주무대였다. 게다가 지리산을 노래한 시인들은 또 얼마였던가.
지리산 천은사 계곡
백두대간의 시발점이자 종점도 지리산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큰 산줄기들은 국토의 등허리를 타고 내려온다. 소백산과 덕유산을 거쳐 내려오다가 큰 산 앞에서 멈춘다.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이나 노고단 정상에 서 보라. 산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어떤 높은 봉우리도 파도처럼 그 아래서 일렁일 뿐이다.
우리 국토는 70%가 산이다. 산이 그렇게나 많지만 지리산은 숭배의 대상이다. 높지만 가슴이 넓어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옛 부터 한라산, 금강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이라 했다, 세상에서 제일이란 뜻으로 방장산(方丈山), “백두에서 흘러왔다”는 표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렀다
불교의 보금자리가 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지금도 지리산에는 많은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구례의 화엄사와 천은사, 하동의 쌍계사와 칠불사, 남원의 실상사, 산청의 대원사와 법계사는 지리산의 으뜸 사찰들이다. 지리산에 있는 사찰의 불교문화재가 국보 7점, 보물이 21점이나 되니, 문화유산의 보고임에 틀림없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국가였다. 그러나 지리산은 불교를 품으며 그 넓은 도량을 한없이 품어 주었다. ‘소도’ 같은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구례 들녘 넘어로 구례읍이 보인다.
구례군청이 있는 구래읍은 생각보다 작고 조용하다. 군청 문화관광과에 들려 자료집을 얻어 나왔다. 매천 황현을 답사하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그들은 내게 보관 중이던 자료집을 꺼내 주었다. 최근에 펴낸 구례군지도 받았다. 그리고 담당 여직원은 정동인 회장( (사)매천 황현 선생 기념 사업회 회장, 전 전남도교육감)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답사 중에 행운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전화를 하니 마침 정 회장은 식사중 이라며, 함께 점심을 하자고 권했다.
구례군은 삼국시대 때는 백제 땅이었다. 당시 지명은 구차례현(일명 구차지현)이라 불렸다.
통일신라 때는‘구차현’, 757년(경덕왕16년) 구례현이 되었지만 곡성군에 편입된다.
고려초기에는 남원부에 예속되기도 했다.
1423년 조선 태종 13년에 구례현으로 승격되고, 세조때에는 순천부에 속하게 된다.
1499년 연산군 때에 부곡으로 격하되어 남원에 속하였다가 1597년 현으로 복귀한다.
1895년에 비로소 구례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정동인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매천 황현의 충절을 선양하고 영혼을 모시는 사당인 매천사를 찾아가는 길은 벚꽃이 지천이다.
지리산 노고단은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고 길 좌우에는 늦은 벚꽃과 영산홍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경치가 아름다우면, 옛 추억이 떠오르고 가슴이 설렌다.
2002년 여름 이 길을 무심히 지나가고 난 후에 얼마나 후회를 하였던가. 단체로 노고단과 화엄사를 탐방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시에 매천사에 참배를 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고 답답했었다. 겨울이 추웠고 길었던 탓에 남아있는 벚꽃들이 바람에 눈발처럼 휘날린다.
지리산 천은사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청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 것은 이 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리산을 스승처럼 대했다. 왕의 부름을 거절한 이유는 아마도 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조선중기에 지리산 동쪽에 남명 조식이 은거했다면, 한말의 매천 황현은 지리산 서쪽에 은거한 사람이다. 모두 처사로 평가할 만한 분들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현대에 와서 많은 피흘림이 있었던 전쟁터였다. 남북분단의 한이 서린 곳이다. 지리산 광활한 산줄기와 골짜기마다 빨치산들이 국군에 저항했다. 일부는 휴전 후에도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구례 피아골, 남원 뱀사골, 산청 칠성계곡은 피로 얼룩진 수난의 골짜기다. 그 피흘림의 역사를 잊고 지금은 시신이 썩어 나무와 식물의 거름이 되어 주었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흐드러지면, 목숨을 걸고 지리산으로 은신했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산줄기엔 빨치산들이 몸을 숨겼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이념의 싸움터였던 구례 피아골, 남원 뱀사골, 산청 칠성계곡과 의신골은 쫓고 쫓기는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다. 이념이 과연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비참했던 동족간의 부끄러운 이념전쟁을 영원히 기록하게 될 것이다.
천은사를 휘돌아 화엄사 방향으로 달려간다. 일주문에서 화엄사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늦은 벚꽃들은 이제야 만발하였다.
화엄천의 개울물은 수량이 많아 산속의 정적을 깨운다. 일주문에서 1킬로미터 승용차로 달린다. 화엄사다. 화엄사 경내도 고즈넉하지만 단체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지리산은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하며, 때로 뜨겁게 하기도 하는 산이다.
구름에 쌓인 지리산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柳蒙寅)은 지리산을 금강산과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다육소골(多肉少骨)이라는 표현이다.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유몽인의 저서 어우집(於于集)의 인용이 지리산의 육감적인 표현일 것이다.
지리산은 도를 찾아 떠나는 이들에게는 도가의 이상향이었다. 지리산은 종교의 보호처였다. 무속과 불교, 유교의 근거지였으며, 민중들의 저항지였다. 의병들이 왜적들과 싸우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은신처였다. 결국 지리산은 새 세상 운동과 그 동질 세력들의 집결지였다.
한 많고 굴곡 많은 현대사의 분수령인 8·15와 6·25 와중에서 빨치산의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그들이 토벌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간의 처참한 살인의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었다. 유독 철쭉과 진달래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은 슬픈 죽음을 위로하기 위함 때문인지 모른다.
2)매천사에서
매천사가 자리 잡은 수월리(월곡리) 마을은 고즈넉하다. 매천사 대문인 ‘창의문’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인근의 노고단이나 화엄사는 방문자들이 많은데, 이곳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이곳은 지리산 기슭의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화엄사에서 천은사로 이어진 구례와 남원의 19번 국도는 이 마을에서 가깝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치는 곳이지만, 정작 매천사에 들려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인식하고 돌아가는 이는 드물다.
매천사 문은 닫혀 있다. 참배자가 없다는 반증이다.
월곡마을 입구
자물쇠 고리가 잠겼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열려 있다. 먼저 정동인 회장이 외삼문인 매천사 대문(창의문)을 열고 들어선다. 매천 선생이 순절한 서재 대월헌(待月軒)이 기다리듯 앉아 있다. “달을 기다리는 집”이란 당호가 사뭇 문학적이다.
대월헌 앞에 서니 스산하지만, 맑은 역사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곳을 찾아오려고 마음을 먹은 지 꼭 20년 만에 대월헌 앞에 섰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듯 미루면 세월의 강을 건너야 한다.
오른쪽에는 유물전시관이 굳게 잠겨져 있고, 그 앞에 '梅泉黃先生廟庭碑'(매천황선생묘정비)가 서 있다.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을 열고 뒤뜰로 나서니 매천사(梅泉祠) 재실이다.
매천의 초상은 1911년 5월 채용신이 그렸다. 채용신은 의식 있는 화가였다. 그는 당대 항일 투사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 군수를 지낸 선비였다고 하는데 유독 항일 투사들을 그렸다고 하면, 그의 평소 의식을 알 만하다.
매천의 의지적인 눈빛과 얼굴 모습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매천을 의미하는 매화가 심어져 있지만 이미 꽃은 지고 파란 잎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매천사 전경
안내 표지판을 읽는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이곳은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5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매천 선생은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고종 20년(1883) 실시된 과거시험에 1등하였으나 시골태생이라 하여 2등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25년(1888)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원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들의 부패를 보고 구례로 내려와 시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10년 한일 합방의 비운을 통탄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고종 1년(1864)부터 1910년 한일 합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을 썼고, 시문집 원고와 소장 서적 등이 보존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건물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매천사 안내문 인용
매천사
매천사 앞에서 정동인 회장과 함께 묵념을 드린 후에 매천 고택을 향해 걷는다. 고택에는 인기척이 없다. 불러도 아무 기척도 없어 발걸음을 돌린다.
이 집에는 매천의 증손부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매천 선생의 고손자는 지금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매천 황현 후손들의 삶을 듣고 보니 매천은 먼 역사 인물이 아니었다.
가까운 역사 속에 살아 있는 분이다.
매천사가 있는 위치한 광의면 수월리(월곡리)는 매천이 48세에서 56세까지 8년 동안 살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그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스러져 가고 있는 조선의 불꽃을 살릴 방안을 모색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국은 일제의 마수에 걸려 망해가고 있었다. 그는 마음에 칼을 갈며 사상과 역사, 문학에 자신의 뜻을 새겨 넣었다.
대월헌은 절명시 4수와 유서를 쓰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편을 먹고 운명했던 서재이다.
이 집이야 말로 조선 선비의 기상과 지조가 살아 있는 집이다.
매천사 왼쪽 옆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소나무 숲이 인상적인 산 아래 집터가 안정적이다. 고택 뒷산의 소나무 숲에 그의 묘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래전에 광양으로 이장했다.
매천 고택
김택영은 매천집 서문에서 매천 황현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매천은 기개가 대단하여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교만하거나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무리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면박하였으니, 당시에 세도를 부리던 권력층들은 매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대하면 따뜻한 봄날처럼 부드럽게 담소하였다. 마음이 맞는 친구 중에서 멀리 귀양을 가거나 상을 당하는 경우에는 백리나 천리의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달려가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봐주며 조문하였다. 평소에 글을 읽다가 충신이나 의사(義士)들이 곤경에 처하여 액운과 싸우던 원통한 대목을 보면 그만 철철 눈물을 흘렸다”라고 썼다.
정의를 저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는 자는 증오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과 약자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었다.
이런 구도자 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목숨을 끊지 못했으리라.
봉건적인 모순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는 권력을 선택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붓으로 저항했다.
그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자함을 지녔지만, 불의한 세력가들에게는 위협적인 언사를 구사하였다.
당시 인간적이며 높고 고매한 학문을 습득하였던 선비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실천적인 행위가 없었다. 매천은 달랐다. 그는 현실적인 모순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조선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모습을 보여준 상징이다. 총과 칼을 들고 왜적을 향해 달려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의 모습은 강인한 저항적 모습이다.
그러나 절명시와 유서를 쓰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 보다 더 큰 저항이다. 무지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식으로 깨어난 사람들은 필연코 칼과 총을 들고 저항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천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것이 참 선비답고 지사적인 모습의 전형이다. 매천이 위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감동과 희생이 없이는 창조적 역사행위를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매천사 전경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서럽고 고통스러운 삶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매천은 당대 조선 민중이 당하고 있던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다만 시대적 한계를 완벽하게 벗어난 진보적 학자는 아니었다. 당대 조선의 봉건적인 모순을 파악했을 뿐, 그에게는 혁명적인 실천의 힘은 기르지 못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맹신하던 성리학 중심의 고루한 학자는 분명 아니었다. 다산의 삶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천의 저서 ‘매천야록’에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학문적인 업적에 찬탄을 하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무너지던 조선을 일으켜 세우고 백성을 구하기 위한 그의 의지와 집념이 번뜩거린다.
눈발처럼 날리는 벚꽃을 보며 호양학교로 향한다.
3) 호양학교에서
매천은 54세(1908년)되던 해에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의 주민들과 함께 호양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애국정신과 신식학문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학교를 그냥 두지 않고 일제초기에 폐교시킨다. 그 설립 취지만은 광의보통학교와 방광학교로 그 정신은 이어졌다. 그러나 방광학교도 1999년에 폐교되어 지금은 지리산수련원이 되어 있다. 1908년 호양학교를 건립하고 신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실천의지의 한 단면이다.
나는 호양학교 강당에 앉아 100년 전의 역사를 상상해 보았다.
호양학교 전신 한옥 교사
1910년 8월 29일은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모든 권한을 빼앗은 '경술국치'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날은 대한의 모든 통치권을 영구히 일제가 빼앗아 간 날이다. 합법을 가장한 합병조약에 의해 27대 519년 만에 조선 왕조가 그 명운을 다하지 않았던가.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
이 말은 매천이 자결하기 전에 한 말이다. 이렇듯 당시 상황을 성찰한 매천 황현은 조선 선비의 지조 있는 삶의 모델이다.
나는 호양학교를 서성거리며 그의 시를 읽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 일을 생각하니, (추등엄권회천고 秋燈俺券懷千古)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난작인간식자인 難作人間識字人)
1905년 을사늑약과 1945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조선 선비 65명이 자결하였다.
인간이 대의를 위해서 지조를 지키려고, 목숨을 끊는 행위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결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죽음이 부른 의식의 파장은 민중들의 가슴을 흔들게 된다.
자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자결은 죽음이 아니다. 부활을 부르기 때문이다. 역사의 화석이 되어 떠돌던 민중들의 의식화를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자정(自靖: 자결)이란 그 방식이 어떠하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독을 삼키든 곡기를 끊든 어떤 방법도 더 가볍거나 수월하지 않다. 을사년 이래 기미년(1919)까지 안동에서는 모두 열 분의 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 중 여섯 분은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바람처럼 퍼지는 의식의 확산이 보여준 예다.
호양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그가 헌신했던 것은 민족을 각성시키는 일이었다. 신학문을 통한 인재를 양성하여 위기를 타계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학교를 폐교시킨다.
그러나 구례 사람들의 독립의지와 학업의지는 대단했다. 광의학교와 방광학교로 거듭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후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제가 지리산에 벌목한 목재를 가지고 국내 최초로 한옥 교실을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이 한옥 건축물은 국내에서 가장 그 규모가 큰 것으로 역사성을 인정받아 문화재 등록이 되었다.
한옥 건축물은 이 지역 사람들의 자원봉사로 지어진 것이어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교실 한 칸을 매천 황현의 시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시비까지 있는 이곳은
매천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호양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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