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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매천 황현과 구례(하)

달처럼 2010. 7. 4. 19:02

                                         매천 황현과 구례 (하)

 

                                                                                                                       사진/ 글   김경식

 

 

4) 매천 황현의 삶과 죽음

 

 

매천 황현은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그의 10대조는 황진(1550~1593)이다.

황진은 동복(화순)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충청병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고 덕을 보게 되는 존재이다.

매천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조부 ‘황 직’이다. 그의 할아버지 황 직은 양반이었지만 상업에 종사하여 큰 돈을 벌었다.

당시 7백석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황 직은 큰 아들이 죽자 큰 실망을 하고 작은 아들에게 물려준다.

작은 아들이 매천 황현의 아버지였다. 매천이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는 이때 마련된 것이다.

매천이 3천여 권의 책에 싸여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어 가능했을 것이다.

매천은 스스로 이 때 일을 ‘왕고수적발(王考手蹟跋)에서 밝히고 있다.



                                월곡리 가는 길

 

다음은 매천 황현의 삶에 관해서 연대순으로 기록해 보려고 한다.

매천은 1855년 12월11일(음력)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 서석현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황시묵, 모친은 풍천 노씨였다.

3세 때에 이미 벽에 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하니, 그는 이미 선비의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다.

 

5세 때에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상촌으로 이사한 후에 7세 때에는 토지면 석현리로 이주하여 서당에 입학한다. 유년 시절에 몇 번의 이사는 세상 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7세 무렵에 이미 그는 침식을 잊고 독서에 열중한다.

 

10세(1864년) 때에는 통감을 읽고 후학을 가르칠 정도였다. 더 배울 것이 없어 스승을 찾았는데 그가 천사 왕석보 선생이다. 구례에 신동이 났다고 떠들썩했던 것은 이때의 일이다.

 

14세(1868년)에는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응시한다. 17세(1871년) 구례군 마산면 상사리 해주오씨 오현 위씨의 따님과 혼인한다.

 

15세(1869) 당시 장성에 거주하던 대학자 기정진 선생을 찾는다. 이미 70세가 넘은 노사 기정진 선생은 매천과 대화를 나눈 후에 놀란다. 매천의 학문적인 태도와 이미 이룬 학문적인 깊이 때문이었다. 그는 매천을 위해 한 편의 한시를 지어준다.

제목은 증황현삼수(贈黃玹三首)였다.

 

24세(1878년)때에 한양으로 상경하여 강위(1820~1884)를 만나 교류가 시작된다.

26세(1880년) 매천의 장자가 태어난다. 한양으로 이건창을 만나러 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가 벽동으로 유배를 떠났기 때문이다. 개성에 있던 창강 김택영을 찾아가 만난 후에 금강산을 기행한다.

27세(1881년) 만나보고 싶던 이건창을 만나 학문적인 교제가 시작된다. 김택영과 함께 교류하며 신교관계(神交關係)를 맺는다.

 

29세(1883년)에 보거과에 장원을 하였으나 구례의 산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합격시킨다. 이에 실망하여 낙향한다.

 

32세(1886년) 광양 석현에 살고 계신 부모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현재 수평리 67번지 상만 마을)로 이주한다. 구안실(苟安室)이란 당호를 걸었다.

 

구안실은 서재였다.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열중하며 나라 걱정을 했다. 이 해에 주미공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천거된다. 이 천거를 한 사람은 친우 이건창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거절한다.

 

34세(1888년)에 생원 회시에 장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부모님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기에 시험에 응시한 것이었다. 이 시험의 책임 시관이 정범조였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탐관오리들은 세상을 농락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사벼슬 닭 벼슬 보 듯하며 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부패를 목격하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와 칩거한다.

이런 은둔에 대해 그의 벗들은 상경을 요청한다. 

 

 

45세(1899년) 시국의 조언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으며, 이건창이 세상을 떠나자 강화도까지 도보로 문상을 하고 돌아왔다. 왕복 1600리 길을 도보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들녘을 걸었을 문상 길을 회고하면, 그 의리와 정겨움이 오히려 아름다운 슬픔으로 가슴에 전달되어 온다.

 

48세(1902년) 마침내 그는 왕사천, 이기 등의 권유로 만수동에서 월곡으로 이주한다. 대월헌(待月軒)으로 당호를 짓는다. ‘달을 기다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이 집은 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다.

 

51세(1905년) ‘을사늑약’의 치욕스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오애시, 문변삼수, 혈죽등 한시를 지어 나라가 망해가고 있음을 탄식한다. 이 무렵 그는 김택영으로부터 중국으로 망명하자는전갈을 받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매천에게 을사늑약은 절망의 늪이었다. 비통한 현실을 감당할 길이 없어 그는 ‘문변3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었다. 멸망하는 조국의 운명 앞에 힘없이 초야에 살고 있는 선비의 울분을 한시로 옮겼다

매천은 이들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모의 정을 감당할 방법이 없어 두보(杜甫)의 8애시를 모방하여 시를 짓기도 한다. 그가 흠모한 인물은 최익현이다. 면암 최익현은 의병운동의 선봉장이었다. 싸움 중에 패하여 잡혀서 대마도에 구속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단식으로 왜적에게 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월곡리 들녘

 

52세(1906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시 8수를 지었다.

56세(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공문과 신문들이 도달하자 그는 대월헌의 문을 잠그고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음력 8월6일이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다만 매천이 당시에 결행한 자결은 망국을 당했지만 책임지는 자가 없는 부끄러운 시대의 심장에 겨눈 날카로운 비수였음을 인정한다. 결국 그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 살아나 지금도 꿈틀거리며, 지조 없이 사는 이 시대의 누군가를 향해 질타하기 때문이다.

 

“나는 벼슬을 하지 않았기에 조선 조정에 대해 목숨을 끊을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조선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이 된 나라이다. 이런 나라가 멸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1911년 중국 절강성 남통주에 망명중인 그의 벗 창강 김택영 선생이 매천집을 간행한다.

국내로 몇 백부가 반입되어 배포되었으나 왜경에 의해 몰수 되었다. 다만 몇 부가 살아남아 해방 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그의 죽음은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천적인 행동을 보여준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했다. 이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삶을 제대로 마무리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자신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을 찾고 있었다. 선비의 도를 걷기 위해 난세에 지조를 지켰던 의인들을 중국역사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매복(梅福), 관영(管寧), 도잠(陶潛), 고염무(顧炎武) 등이다. 그들의 삶을 제자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의 글씨와 그림으로 제작한다. 그림마다 시를 한 수씩 지어서 병풍을 만들었다. 이 병풍이 지금까지 전해온다고 하니 기적이다.

 



               매천 동생 황원이 자결한 월곡저수지

 

 

매천의 친동생 황원(黃瑗1870~1944)의 삶도 그냥 넘길 수 없다. 매천집을 간행하는데 큰역할을 한다. 매천과는 비록 15세 연하지만, 시우로서 화답시를 나누는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애 좋던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시행되었던 창씨개명에 반대한다. 강호려인(江湖旅人)이라는 문패를 달고 일제의 시책에 저항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기도 했다. 강호려인이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다.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던 그는 결국 동네 윗편 월곡저수지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자신의 형 매천이 세상을 떠난지 34년이며, 조국이 해방되기 1년 전이다. 그는 유서 대신에 칠언율시 1수를 유시(遺詩)로 남기고 형의 곁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가 순국한 월곡저수지 주변을 거닐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5) 매천 황현과 문학

 

매천 황현은 조선 후기 3대 시인이다. 매천야록은 역사서이지만 그가 47년간 쓴 일기이다.

1864년부터 1910년 8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쓴 이 기록문학은 그의 위대성이 번득인다.

1911년 발행된 매천집은 그의 시문과 산문집이다. 그의 한시들은

절명시를 제외하고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번역이 늦게 이루어 졌고, 1980년대 이후에 번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11년 김택영이 간행한 매천집에는 무려 839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번역집은 2007년 2월에야 간행되었다. 이병기, 김영봉의 공동번역으로 <역주매천황현시집> 상,중,하권이 그것이다.

 

1992년 평민사에 허경진이 번역한 <매천황현시선>은 고작 100수가 수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1984년 전주대학교 호남학연구소에서 정리 간행된 자료에 의하면, 매천은 1015수의 한시를 썼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고 있는 한시는 170수 정도가 남아 있다.

 

1911년 그의 친우 김택영에 의해서 중국 상해에서 발행 된 매천집(梅泉集)은 전 7권 3책이다.

역사서 ‘매천야록’과 역사 비평서 ‘오하기문’에는 매천의 역사의식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그가 위대한 시인이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매천시집’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구례에 살던 지방 문인을 중앙문단에서 알아주었던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이 있었기에 덜 외로웠다.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다가오는 파국의 조선을 예언한 사람들이다.

절명시는 쉬운 시가 아니다. 은유가 강하고 몇 번을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난리를 당하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고,

몇 번이나 자결하려다가 이루지 못했네

오늘 진정으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데,

가물거리는 촛불은 창천(蒼天)에 비치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성(帝星)은 이동하고,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네.

이제 조칙(詔勅)을 받을 수 없고,

아름다운 한 조서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구나.

 

 

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으니,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송나라 윤곡의 길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인데,

진동의 행동을 따르지 못했음이 부끄럽네.

 

 

제1수에서는 이미 죽음에 대한 결심이 암시되어 있다. 제2수에는 망국에 대한 슬픔이 표현되어 있다.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3수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울분과 절망을 탄식하고 있다. 제4수에는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에 관한 한탄이 녹아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는 절명시의 제3수다.

15세 때에 찾아뵈었던 노사 기정진 선생이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만시(弔輓詩)를 썼다. 조만시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모하며 쓴 시를 말한다. 매천은 약 90여 편의 조만시를 썼다.

 

                                            매천 고택 정문

 

기정진 선생을 위해 쓴 조만시를 읽어본다.

근세빈빈성(近世彬彬盛) :근세의 조선 인물 많기도 하지만

진유경역회(眞儒竟亦稀) 참된 유학자는 역시 많지 않았네.

선생기남복(先生起南服) 선생이 우뚝 호남에서 일어나,

척수장동귀(隻手障東歸)밀려오는 오랑캐를 한 손으로 막았네

 

-- 김영봉 번역 인용

 

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公龜船歌)는 32행이나 되는 장편 애국시다.

외세가 밀물처럼 밀려올 때, 그는 역사 속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찾아내어

용기를 얻으려 했다. 이충무공귀선가 끝 부분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구원가작충무공(九原可作忠武公) 구천에 게신 충무공 모셔 올 수 있다면

낭저회기응유술(囊底恢奇應有術) 주머니 속엔 응당 기발한 술 수 있을 텐데.

창지제승여귀선(創智制勝如龜船) 거북선 만든 지혜로 가는 곳마다 이기면,

왜인걸사양인멸(倭人乞死洋人滅) 왜놈은 살려달라 빌고 양놈은 물러가련만.

 

--김영봉 선생 번역 인용

 

                                                   매천 한시 전시관 

 

 

 

매천은 만 권의 책을 읽고 기행을 다녔다고 한다. 매천의 삶에 대한 자신감은 그의 독서력에 있다.

이런 매천이지만 시에 관해서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만한 벗이 있었다.

강화도가 고향인 이건창이다. 1881년 매천은 영재 이건창을 만나 평생지기가 된다.

비록 나이는 이건창이 3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그들은 문학과 학문을 논하는 친구였다.

이건창을 통해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매천의 한시들이 알려지게 된다.

 

매천 황현이 한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강위. 이건창, 김택영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이었다.

매천은 애국과 관련 된 한시들을 많이 썼다. 특히 그의 한시에는 순국지사와 의병들에 관해서는 관심과 격려가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애정이 없으면 시로 승화 시키 지는 못 했으리라.

이건창은 매천을 한양의 중앙문단에 소개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는 800리를 걸어 강화도에 까지 가서 조문하고 조시를 쓴다.

 

문영재장기이과(聞寧齋葬期已過) 라는 칠언율시 8수를 썼는데 마지막 부분을 읽어본다.

 

서주문외다추초(西州門外多秋草) 서쪽 문밖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천지소소루만행(天地蕭蕭淚萬行) 천지는 쓸쓸하여 만 줄기 눈물만 흐르네.

-중략

 

평생열루사겸우(平生熱淚師兼友) 평생 뜨거운 눈물 스승과 벗처럼 하고,

천고영려월재천(千古英靈月在天) 천고의 영령은 달과 같이 하늘에 있도다.

대규추등광욕절(大叫秋燈狂欲絶) 가을 등불 밑에 크게 소리치고 미치고 애절하여,

추도할진갑중현(抽刀割盡匣中絃) 마침내 칼을 뽑고 거문고를 쪼개고 마네.

 

--김영봉 선생 번역 인용

 

                                 매천 시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매천은 가슴앓이를 했다.

그는 붓을 들어 문변(聞變)이라는 칠언절구 3수를 쓴다.

그는 자살을 미화한 시를 쓰게 되는데, 금나라 애종왕과 명나라 마지막 숭정황제의 죽음을 인용한다.

 

금나라 애종왕은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 목매어 자결한 왕이며, 숭정황제는 명나라가 망할 때 만세정에서 자살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자결의 실체를 알고 있던 그는 홀연히 붓을 들어 한시를 써 내려 갔다.

문변(聞變)이란 제목을 한시 3수를 읽어보면 당시 그의 마음가짐을 이해 할 수 있다.

 

열수탄성백악빈(冽水呑聲白岳嚬) 한강 물 흐느끼고 북악산이 신음하는데

홍진의구족잠신(紅塵依舊族箴紳) 세도가 양반들은 티클 속에 묻혀 있네

청간역대간신전(請看歷代奸臣傳) 청컨대 역대 간신 전을 흩어 보소.

매국원무사국인(賣國元無死國人) 나라를 팔아먹었지 나라 위해 죽은 자 없다네.

 

-- 황현의 시 문변(聞變)3수중에서 김영봉 선생 번역

 

상해로 망명하여 매천집을 간행하였던 창강 김택영은 황현의 문학을 ‘조선조 500년에 있어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고 극찬했다.

 

 

6) 매천 황현의 처가 마을을 지나며

 

지리산 노고단(1507m) 남녘 기운을 흠뻑 받고 있는 토지면 상사리는 매천 황현 선생의 처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국에서도 가장 장수마을로 꼽힌다. 1986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국내 제1의 장수마을에 선정되었다. 상사마을의 장수비결은 ‘지리산 약초 뿌리가 녹아 있다’는 ‘당몰샘’이다.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여 샘물을 맛보지 못하고 떠난다. 마을이 빤히 보이는데 상등성이 앞에 자리 잡은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그곳에 서면 구례읍을 포함하여 광의면과 토지면의 들녘이 모두 조망된다. 상사마을의 당몰샘은 2004년엔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뽑혔다.

이 마을 토박이는 본래 의성 김씨였다. 그들은 명당을 찾아 전라도 땅을 이리 저리 헤매다가 당몰샘을 발견한다. 이 샘을 발견하고 물을 저울에 달아보았다. 다른 곳보다 이 샘의 물이 무겁고 수량도 풍부하여 이곳에 정착한다.

 



                               장수리 전경

 

 

60여 호쯤 살았던 마을에는 지금은 외지인들이 장수마을에 살고 싶어 13호쯤 가구가 터전을 잡았다.

최근엔 13호쯤 가구 수가 늘었다. 그것도 당몰샘의 신기한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을 가득 담아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따라 당몰샘은 오늘도 전국 각지로 지리산 생명력을 고루고루 흩뿌리고 있다.

 

 

  7) 석주관 칠의사 묘에서

 

3,500명의 의병과 150여명의 승병이 숨진 석주관에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이곳에서 내 놓았을까. 조선 조정이 그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고 무슨 은혜를 베풀었던가.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곳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목숨을 버렸다. 지리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면 자유의 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서 왜적과 결전을 버렸고, 모두 전사했다.



                    석주관 전경

 

 전투의 처절함에 가슴이 아프고 날씨조차 스산하고 숙연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진강가에서 벌어졌던 그토록 큰 싸움을 나는 잊고 있었다. 부끄럽다. 우리국토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늘 역사의 아픈 사연들이 스며 있다. 이곳 석주관과 칠의사 묘소 주변도 그렇다.

 

 

석주관과 칠의사 묘소는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왕실봉 줄기 밑에 위치한다. 석주성은 섬진강을 오르는 관문이었다.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 이곳은 작지만 옛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석주관 아래 섬진강가에는 조선조 때는 나루가 있었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섬진강 상류를 따라 남원을 공격하기 위해 때거지로 몰려왔다. 그런데 왜적을 공격한 무리가 있었다. 의병과 승병들이었다. 의병과 승병들은 이곳 석주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석주관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일곱 분의 무덤을 향해 오른다.



                                칠의사묘소

 

무덤이 이렇게 초라한 것은 아직 이들이 제대로 선양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비석에는 사뭇 비장한 표현이 아른 거린다. "피가 강물이 되어 푸른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血流成川 爲碧爲赤)고 기록해 놓았다. 피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피가 강물이 되었지만 이곳에 서니 이름 없이 죽어간 의병들과 승병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 갈 때면, 왼쪽 언덕 위에 있는 무덤들을 찾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무덤에 참배하고 돌비석에 새겨진 역사의 선연한 자국을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왜적에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이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제대로 조명하고 평가될 때, 비로소 그들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8) 운조루에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운조루라는 택호를 가진 고색창연한 고가가 앉아 있다.

이 집은 1776년에 류이주 (柳爾胄1726∼1797 )가 세웠다. 99칸(현존73칸)의 큰 주택이다.

운조루의 건축 배치형식은 품자형 (品字形)이다. 전형적인 양반가택의 형태이다. 이 집을 건축한 류이주는 처음에 당호를 귀만와 (歸晩窩라고 불렀다. 그는 구례에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 이라했다.

 

‘구름속의 새가 숨어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운조루의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칠언율시에서 따왔다.

구름은 산골짜기로 무심하게 피어오르고(雲無心以出岫)

날기에 지친 새들이 집으로 돌아오네(鳥倦飛而知還)라는 시를 읽으면,

이 집이 문학적인 정서를 가진 집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운조루는 우리나라 3대 길지라고 한다.

 

                    운조루 전경

 

실제로 답사를 해 보니 풍수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단박에 그 지형을 인식할 수 있다.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운조루 앞에는 오봉산이 서 있다. 풍수학자들은 이 산이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대문 앞의 아름다운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 하기 위해 조성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운조루는 금환락지 (金環落地)다. 오보교취 (五寶交聚), 오봉귀소

(五鳳歸巢)로 열거되는 명당이다.

 

특히 운조루의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어 금귀몰니(金龜沒泥)명당이라고도

 불린다.

예전에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깥사랑채만 남아 있다.

 

운조루 사랑채

 

이 집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면, 나무로 된 쌀독인 ‘목독’이다. 쌀독의 마개 입구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든지 이 마개를 열수 있다”고 까만 붓글씨로 써 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베푼 이 집 주인의 긍휼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집을 짓고 음덕을 베풀었기에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류씨 가문이 번창한 이유는 자신들의 도리와 분수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물질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운조루는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실천했던 명문가다. 우리사회가 당면한 지도층을 각성 시킬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은 이곳 운조루에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정신이다.

쌀 뒤주에 담겨 있는 나눔의 정신'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없다면, 나는 이 집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화엄사나 천은사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운조루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화 류씨 10대 종가집이다.

 

                                                운조루 뒤주 <타인능해> 글씨

류이주는 무인으로 삼수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수원화성과 남한산성, 낙안읍성의 건축공사에 참여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이 집을 지었다.

 

쌀 두가마니 반은 족히 들어갈 나무로 만든 쌀뒤주를 곳간 뒤채에 두었다. 뒤주 하단부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쌀을 가져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타인능해(他人能解)는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도 쌀뒤주 덮개를 열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운조루 집안의 한 해에 수확하는 쌀은 대략 200가마 정도였다. 이 뒤주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제공했던 쌀은 약 36가마였다. 나무 뒤주를 곳간 뒤채에 둔 까닭은 쌀을 퍼갈 때 운조루 식구들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밥을 굶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집에 와서 쌀을 가져 갈 수 있었으니 그 소문은 전 고을에 퍼졌다.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솟아오르면 위화감이 조성될까하여 굴뚝을 낮게 설치했다. 이 집은 이런 배려 정신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1만여편의 시(詩)를 썼던 시인이다. 생활일기와 농가일기가 가보처럼 전해온다.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대단한 기록물이다.

우리에게 이런 가문이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선양해야 할 몫이다. 구례는 운조루의 덕을 입어 풍성함이 묻어 있는 고을이다.

 

9) 구례 기행을 마치며

 

매천기념사업회는 ‘매천정신(梅泉精神)선양’이라는 운영목표를 세웠다. 매천 선생에 관련된 역사적 내용을 연구하고 매천 선생의 유적지를 명소화하는 것이 기념사업회의 우선 활동 목표이다.

최근 매천 선생의 숭고한 넋과 정신을 국내외 널리 알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후세에 매천의 혼을 일깨워 애향과 애국정신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2007년부터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회장 정동인 전 전남도 교육감)가 발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구례군이 매천 선생의 선양 사업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비록 그가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에 이미 그는 구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국한 장소도 광의면 수월리 자택 대월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매천사가 있다.

 

몇 년 전에 전남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천 선생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하는 설문을 매천기념사업회가 했다.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매천 선생을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구례가 전남 관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다른 지역을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화엄사 일주문

 

 

매천의 역사관은 박은식과 신채호에 닿아 있다. 그들에게 지조 있는 역사관을 심어 주었다.

매천의 역사관은 전통적인 역사가의 정서에 민족사관이 함께 녹아 있다.

그의 시문학은 일제하의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같은 항일 저항시인을 낳았다.

매천 시에는 시대를 아파하고 상황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인 문학 혼이 들어 있다.

매천 황현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살다가 떠난 선비며 시인이었다.

 

중세 봉건 사회의 질서가 해체되고, 구미 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가던 시대였다. 황현의 역사의식과 문학은 이런 상황이 바탕이다.

매천의 정치 사회적인 생각들은 ‘언사상소문’에 9개 조목에 잘 게재되어 있다.

언사상소문의 요약은 언론의 자유와 법령의 권위를 높이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황현은 평생을 붓으로 현실에 참여한 문인이다. ‘문이 무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매천 황현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는다.



                           구례의 들판

 

더 이상 붓으로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저항하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정신운동이 일어나길 기원하였는지 모른다.

그의 애국정신과 문학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인지도는 낮다.

그가 만약 한문으로 문학을 하지 않고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다면, 대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문학적으로 내가 느끼는 아쉬운 점이다.

 

 

매천사에서 천은사 골짜기로 이어진 지리산 진달래 핀 굽이굽이 산자락은 황홀한 슬픔을 자아냈다.

유년의 그리움이 몽실거리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달래가 핀 산을 보면,

그 숲에 매혹된다. 이번 기행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감상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지리산은 역시 가슴이 넓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많은 죽음들이

곰삭아 있음을 알기에 슬픔도 아른거렸다. 그러나 지리산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불게 물들면, 그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영혼도 안식을 얻으리라. 구례는 지리산이 품은 고을이다. 매천사와 운조루가 있어 역사와 문학의 혼이 꿈틀거리는 구례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