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문학기행 - 매천 황현과 구례 1. 매천사와 매천 고택

달처럼 2010. 7. 4. 20:19

2010년 5월 문학기행은 구례를 찾았다.

100년 전 경술국치(1910년)를 당했을 때,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의 삶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구례에 도착하여 처음 밟은 곳은 매천 황현 선생의 사당 매천사(梅泉祠)이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을 읽는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이곳은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5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매천 선생은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고종 20년(1883) 실시된 과거시험에 1등하였으나 시골태생이라 하여 2등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25년(1888)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원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들의 부패를 보고 구례로 내려와 시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10년 한일 합방의 비운을 통탄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고종 1년(1864)부터 1910년 한일 합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을 썼고, 시문집 원고와 소장 서적 등이 보존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건물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 매천사 안내문 인용

 

梅泉祠의 외삼문인 창의문(彰義門) 

 

 매천사 내삼문 한 옆에 세워진 묘정비

 

 매천유물관

 

매천사의 내삼문인 성인문

 

 사당 앞에서 예를 갖추는 문학기행팀

 

 매천사

 

 기념사진

맨 앞 줄 왼쪽부터 길라잡이 김경식 시인, 매천기념사업회 정동인 회장(전 전북교육감), KBS 황제연 PD, 

소설 '매천야록'을 쓴 한승연 작가, 한 사람 건너 매천 선생 종친

 

 

대월헌(待月軒)은 한일강제병합(한일합방) 소식을 들은 매천 선생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 땅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선비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절명시와 유서를 쓰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편을 먹고 운명했던 서재이다.
이 집이야 말로 조선 선비의 기상과 지조가 살아 있는 집이다.

원래는 4칸이던 것을 복원하면서 터가 좁아 3칸으로 지었다.

문학기행팀이 방문한 시간에 맞취 매천사에 찾아 온 구례군청 직원은

올해 대월헌을 보수할 예산을 책정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매천 황현에 대한 지역 사회의 관심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겠다.

 

 

待月軒, '달을 기다리는 집'

구한말 3대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매천 선생의 書室답게 운치있는 당호이다.

일행 한 분이 "옛사람은 기다렸는데, 현대인들은 쫓아가도 잡지 못한다고 안달이지요."라고 덧붙인다.

 

매천사 대월헌 마당 한쪽에 유물관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매천 선생 종부는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유물관 문을 열기로 했다는데,

우리 일정이 빠듯하여 서둘러 나오느라 문 열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내삼문 왼쪽에 고택이 보인다.

 

 고택 울안에 있는 텃밭에서 마늘쫑을 뽑아 주시려는 매천 선생의 증손부

 

매천 고택

 멀리서 오신 손님 제대로 대접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시는 매천 선생의 증손부

 

매천사가 있는 광의면 수월리(월곡리)는 매천이 48세에서 56세까지 8년 동안 살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그가 사상과 역사, 문학에 자신의 뜻을 새겨 넣으며,

스러져 가는 조선의 불꽃을 살릴 방안을 모색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