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김수종 작가로부터 해방촌 답사 일정을 듣고는 바로 참가 의사를 밝혔다. 2년 전 그의 인솔로 해방촌에 왔던 적이 있지만, 그 사이의 변화가 궁금하여 이번 답사도 기대가 되었다. 이번에는 남편과 동행했는데, 용산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던 터라 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며 모임장소로 향했다.
왜 ‘해방촌’인가?
약속 시간이 되자 숙대입구역에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답사에 참가한 회원들이 해방촌 지명의 의미를 묻는다. 해방촌은 남산의 서남쪽 언덕에 형성된 마을로 행정 구역은 용산구 용산 2가동의 대부분과 용산 1가동의 일부 지역이지만, 해방 직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북에서 온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이곳에 살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거주하였다.
해방촌의 어제
숙대입구역에서 남산을 향해 걷노라면 오른쪽으로 끝없이 담이 이어진다. 지금은 미군기지이지만 구한말에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일제 때는 일본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어도 대한민국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땅이다. 그 울타리 안에는 일본군 막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우리 정부가 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지 못하는 사정도 그런 맥락 때문이다.
울타리가 끝나는 곳에 용산고등학교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길손이 머물던 서울 근교의 네 곳의 숙소 중 한 곳인 ‘이태원(梨泰院)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 ‘순국학도탑’이 우뚝 서 있다. 6․25 때 용산고 출신 100여 명이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이 가운데 50여 명이 평남 덕천 전투에서 산화한 것을 기리는 탑이다.
용산중학교를 지나 로터리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108계단이 나온다. 그 위에 있던 일본 신사에 올라가기 위해 일제 때에 만든 돌계단인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오가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조경을 위해 돌계단 가운데에 녹지 공간을 조성한 것이 오히려 역사성 보존이나 도시 미관에 거슬린다.
영주교회를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면 벽화가 아름다운 집들 사이에 아동생활복지시설인 영락보린원이 나온다. 입구에는 ‘전생서(典牲署) 터’ 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전생서는 궁중의 각종 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라고 한다.
보성여고 인근에는 ‘해병대 초대교회’가 있다. 우리 회원들이 들렀을 때에 마침 교회에 있던 이 교회 장로가 예배당 문을 열어주고 교회사를 들려주었다. 한국전쟁 때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로 지금의 건물은 1959년에 해병대 사령부 자리에 건축했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올린 건물인데 아직 외관이 멀쩡하다. 현재 지정문화재 등록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도 한 달에 두 번씩 예비역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해방촌이 풀어 놓은(解放) 오늘
언덕을 다 올라 두텁바위로 60길로 접어들어 독일문화원과 대원정사를 지나면 현재의 해방촌 모습과 마주친다. 서로 이마를 맞댄 작은 상점들 사이로 열린 현관문 안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고 색색의 실타래가 보인다. 가내수공업을 하는 소규모 작업장들이다. 주로 스웨터 제조 공장들인데, 전국 유통 물량의 30%를 생산한다.
해방촌 오거리 주변에는 ‘해방촌 토요놀이마당’ 축제가 한창이었다. 해방촌 도시재생 주민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벌이는 주민 축제라고 한다. 주민센터 앞에도 장터가 차려지고, 교회 마당, 성당 마당, 시장 골목에서도 장터가 열리고 축제 마당이 펼쳐졌다. 장터에는 유기농 재료로 만든 건강빵과 말린 과일도 있었고, 해방촌에 깃든 공방에서 만든 작품들이 있었는데, 가죽 제품, 액세서리 제품 등 개성 넘치는 작품이 많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젊은이들이 축제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촌에는 주민 공동체의 활동을 짐작케 하는 공간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협동조합형 카페인 ‘해방촌 빈가게’는 전시, 공연, 각종 모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신흥시장 안에 있는 ‘해방촌 네평학교’는 마을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꺼리’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주인이 되는 공간이다.
해방촌교회는 특별했다. 교회 마당이 마을 축제의 장이 되는가 하면, 교회 입구에 나붙은 현수막에는 교회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문화교실을 열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해방촌이 형성될 때부터 월남민들이 교회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교회는 마을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방촌 토요놀이마당’ 현장을 보며 해방촌의 이름이 현재에도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정집이건 교회건 대문을 열어놓고 지내며, 지역 주민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解放(해방, 풀어놓음)’이 아니겠는가.
해방촌이 풀어나갈 내일
해방촌의 남쪽에는 미군 부대가 자리잡아 다른 지역에 비해 외국인 거주자가 많다고 한다. 이태원에 몰려 있던 외국인 거주 지역이 점차 해방촌 지역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태원에 인접한 지역은 피자집, 햄버거 가게, 일본식 주점 등의 간판이 즐비하다. 외국인은 물론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내국인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한편 해방촌에는 골목길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arthill 100’이라는 표지판이 암시하듯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늘어가고 있다. 홍대나 대학로 주변의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예술가들이 찾아들게 된 것이다.
해방촌에 깃들어 살고 있는 실향민과 외국인, 그리고 예술가들이 만들어 가는 미래의 해방촌은 어떤 주거 공간으로 변해갈지 궁금해진다. 대문 밖에 화초를 아름답게 가꾸거나, 담장을 허물고 이웃과 공간을 공유하는 여유를 가진 그들이 앞으로 풀어나갈 이야기는 무엇일까.
2015.09.12. 해방촌 답사 참가자 문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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