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만난 역사
조선 시대에 한양도성의 동부 지역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종로3가에서 혜화동까지 창덕궁 담장을 에워싸고 있는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 군사와 상업 기능이 강화된 지역이다.
임진왜란 후 왕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되면서 창덕궁 주변에 군문(軍門)을 설치하였고, 지방에서 번을 서기 위해 올라온 군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군졸들은 군수품을 만들고 남은 재료로 수공품을 만들어 시전에서 직접 판매해 생계를 해결했다. 한편 성균관 주변의 반촌에서는 한양에 쇠고기를 공급하였으며, 혜화문으로 출입하는 함경도 상인들은 경모궁 주변에 정착하였다. 지금의 광장시장 근처에 있던 이현시장의 성장은 이러한 당시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 일대는 땅을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화재가 즐비하다. 광장시장 맞은편 세운스퀘어 자리는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로 국왕 호위와 도성 수비를 담당하던 어영청이 있던 곳이다. 세운스퀘어 건축 당시에 문화재 지역이라 건축 허가가 어렵게 되자, 지하를 파지 않고 높이 짓지 않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아 땅 속에 묻혀 있을 유물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 넘기게 되었다.
광해군의 잠저인 이현궁(梨峴宮) 터에는 정조 때에 군사 시설인 장용영 서울 본영을 설치했다. 장용영 서울 진영을 그린 '본영도형'이 발견되었는데, 그림 속의 은행나무가 지금도 정정하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자리에 있는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의 교문 기둥은 탑골공원에서 옮겨온 것이다.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시가 탑골공원의 대문 기둥 4개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 기둥으로 기증했다. 본래의 자리를 잃은 기둥에 교명을 새긴 명패가 박혀 있다.
이 밖에 대학로에는 근대 건축물인 대한제국 때 지은 공업전습소 본관과 경성제국대학 본관이 남아 있으며, 옛 사람들이 다니던 길에는 지금도 사람의 발길이 닿고 있다. 정조가 장헌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찾을 때에 넘었던 박석고개, 혜화문에서 배오개로 이어지던 길목에 있던 방아다리, 성균관에서 혜화역 4번 출구로 이어지는 길은 길게는 600년 역사를 담고 있다.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된다. 세운상가의 재정비는 현재 진행형이다. 도시 개발과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보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지혜가 필요하다.
어영청 터에 지은 세운스퀘어
배오개에 있는 이현궁터
이현궁터의 은행나무, 노거수의 위용
탑골공원의 대문기둥이었던 서울사대부설여중 교문 기둥
대한제국 때 지은 목조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 공업전습소 본관이 현재는 방통대 우체국이다.
경성제대 본관은 해방 후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예술가의 집 현판이 걸렸다.
마로니에 공원에 설치된, 서울대학교 터였음을 알리는 조형물
서울대병원 내에 있는 창경궁 후원, 함춘원지(사적 제237호)
지금은 평지가 된 박석고개. 음식점 간판이 고개였음을 알린다.
방아다리. 지금은 복개천 위로 사람도 다니고 차량도 다니고...
길에도 역사가 있다. 600년 역사를 지닌 성균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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