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사찰 정책에 맞서 한국전통불교 수호를 기치로 창건한 선학원
明文堂(명문당)
日帝强占(일제강점)하의 1926년에 '영산방'이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여 한국출판계를 가꾸기 시작하여
1930년 '도서출판 明文堂(명문당)'이라는 회사명으로 변경하여 75년이란 실로 긴 세월 동안 독자와 만나고 있다.
이미 1970년대에 들어서 한국학, 중국학이 주류를 이루는 '동양고전'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전문출판시대의 길을 열었고,
자전·사전·철학·문학·실용·예술서적 등 1천700여종의 도서를 공급하여 왔다.
북촌기행에서 만난 선학원(禪學院)
글/사진 김경식
별궁길에서 만나는 <선학원>은 일제 때에 한국의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사찰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선학원은 항일불교의 본산이다. 일제의 불교정책에 저항하고, 그들의 사찰령과 사법(寺法)을 피하기 위해 사찰이름에 절 사(寺)자를 쓰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모든 사찰 주지의 취임은 물론 동산과 부동산의 변동사항까지 보고하고 사찰하였기 때문이다. 선학원은 유명한 박한영. 만공스님 같은 큰 스님들이 설법을 하였을 뿐 아니라, 백담사에 수행하던 한용운 선생은 당시 경성에 오면 이곳에서 숙식했다. 그러나 북촌의 별궁길 중간에 위치한 선학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학원 전경
불교佛敎는 교리 연구와 수행 방법의 차이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양분된다. 교종은 불경과 경전 낭독을 필수로 행하는 종파이며, 선종은 참선. 묵상. 명상으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종파이다. 선학원을 선종 교리를 설파하는 곳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선학원은 그런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는 종교법에 의해 관리를 받는다. 불교의 경우 모든 재산은 종단에 속한다. 조계종 소속이면 조계종단의 재산에 소속된다. 결국 정부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선학원은 이에 반해 사립재단을 설립하여 종단에 소속되는 것을 막고, 간섭에서도 벗어났다. 종파가 아닌 재단법인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불교정책은 일제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의 이전이 목적이었다. 스님이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대처승의 권장과 사찰령으로 표면화된다.
이런 불교의 조치를 통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조선불교는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민족불교의 전통성이 거세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만든 사찰령은 주지의 횡포를 낳았다.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학원은 이에 대한 반발의 상징이다. 조국의 해방 후에 불교계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친일 불교계 인사들과 타락승을 포함한 일제 불교 청산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선학원을 포함한 7개 단체 인‘불교혁신총연맹’이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했다.
불교정화운동의 요지는 4가지로 압축된다.
1)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한다.
2)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다.
3) 부패된 교단을 혁신한다.
4 사찰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 상을 확립한다.
1941년 3월 법회에서 맨 앞줄 앉은 분들중에서 왼쪽에서 3번째 송만공 스님, 4번째 박한영 스님
불교정화운동의 이런 운동을 통해 그들은 독립된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동참을 인식한다.
불교혁신운동이 민중운동으로의 확산을 우려한 미군정과 보수적인 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과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시작한다.
결국 불교혁신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한다.
해방공간(1945~1948)동안 불교의 관권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한다.
이후 불교 종단은 초기 비구승과 대처승의 싸움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일반인들이 볼 때, 목불인견이었다. 나는 이것이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일제, 미군정, 불교에 비우호적인 대통령, 욕심 많은 스님들이 만들었다고 본다. 1953년 이승만 정권 때에 대처승을 스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한 예다.
가끔 나는 북촌 길을 걷다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며 참선하던 선학원을 바라보곤 한다.
그와 함께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과의 연합을 반대했던 석전 박한영(1870~1948)을 기억한다. 그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불교대중화에 힘쓴 인물이다.
또 한 분은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다. 그는 여산 송(宋)씨로 속명은 도암(道岩)이다.
수덕사에서 보인 도인 같은 만공스님의 일화들은 기인으로서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1931년 조선총독부가 한일불교를 합병하기 위해 조선 13도 도지사와 31본산 주지가 모였다. 이때 만공 스님은 누구도 제대로 한국 불교를 변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당시 그는 마곡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있었다. 만공스님이 입적할 때에 마지막 화두는 불자들에게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만해 한용운의 서명이 보인다.
1946년 10월 20일 그는 목욕을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독백한다. “자네와 나는 이제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며 웃으며 입적하였다. 삶과 죽음을 초월했던 그의 삶을 그대로 입적시에 보여 주고 떠났다. 그의 고향은 전북 태인군이며, 스승은 경허(鏡虛, 1849~1912)스님이다. 그가 스물일곱에 지었다는 ‘오도송’은 은유가 강한 한시처럼 읽혀진다.
그의 뜻 모를 한시 속에는 어떤 화두가 머리를 친다. 황소바람이 휘몰아 가는 북촌 고샅길에서 선학원 출신의 고승들을 생각하며 걷는다. 다시 한번 그의 오도송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의 理氣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白雲淸風自去來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오고 간다
何事達磨越西天 왜 달마는 서천에서 넘어 왔던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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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공스님 오도송 김경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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