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新婦)
서 정 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 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오늘 오후 어느 반 문학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한 번 읽고 이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이상해요. 허구입니다. 말도 안 돼요. ... (한참 지난 후) 불쌍해요. 슬퍼요.
예상대로 아이들은 이 시의 정서를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면 그렇지, '섹시미'와 '짐승남'이 단연 돋보이는 단어가 된 요즘 세태에서 성장한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신혼 첫날 밤에 신방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신랑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것이며,
새색시의 옷고름을 풀어줄 신랑을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 앉은 채 목숨이 다해
죽어서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남편의 손이 닿은 후에야 무너져 내린 신부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랴.
신화적 매력을 도입하여 영적 세계를 표상한 토속적인 심미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라는 설명에 밑줄 긋고
신화적 토속적 정서를 미학의 바탕으로 하여
죽음을 뛰어넘는 여인의 정절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했다고 받아 적은 들
시인이 표현하려던 것이 얼마만큼이나 피부에 와 닿겠는가.
매운 재가 되어 초록 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은 신부에게서 매운 정절이 주는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은
정녕 나이들은 자들만의 몫인가.
갑자기 아이들과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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