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런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 전문
달성 공원은 삼한시대 부족국가였던 달구벌의 성터에 자리잡았다.
고려 중엽 이후 달성 서씨가 대대로 살아왔던 사유지였던 것을 조선 세종 때 국가에 헌납하였다.
달성공원에는 1600 m나 되는 토성과 잔디광장, 동물원이 있어 시민의 휴식공간일 뿐만 아니라
달성서씨 유허비, 동학 창시자 최제우 동상이 있어 의미 있는 장소다.
또한 이곳에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 문인 시비가 서 있다. 이상화의 시비다.
1948년 3월 수필가 김소운이 발의하고 시인 구상 등이 참여한 역사적인 시비다.
'나의 침실로'는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된 시다.
박종화의 '사의 예찬'도 함께 게재되었다.
이 두 편의 시는 죽음을 예찬하고 있다.
밤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이기도 하고 작가의 절망적 삶이기도 하다.
밤이 암담한 현실이라면 새벽을 고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에게 새벽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마돈나와 나'는 슬프다.
이들은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과 같은 존재다.
'나의 침실'은 사랑과 죽음을 상징한다.
시의 전반부(1연에서 6연)는 사랑의 장소다.
그러나 후반부(7연에서 12연)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있는 침실'은 죽음의 공간이다.
이 죽음의 장소는 단순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부활의 동굴'이다.
결국 죽어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저항하라는 메시지이다.
일제 치하 조국의 상황은 그를 저항시인이 되게 했다.
한국근대시인 최초의 시비 - 이상화 시비
상단에는 오세창의 글씨로 '尙火詩碑'라 새겼고
그 아래에 당시 10세 된 아들 이태희가 시 '나의 침실로' 한 구절을 쓴 것을 새겨 넣었다.
(尙火는 李相和 시인의 호)
시비 뒷면에는 수필가 김소운이 지은 글을 서예가 서동균의 글씨로 새겨 놓았다.
달성공원 입구의 안내판
해질 무렵의 공원 풍경
(2010.02.25. 문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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