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아득하기만 했던 90년전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담은 시 한 편을 떠올리며,
우리 나라 근대사에 많은 인물을 키워낸 대구를 찾아 나섰다.
이번 기행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을 쓴 이상화(李相和) 시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상화가 살았던 집과 계산성당, 서상돈 고택, 약전 골목, (구)제일교회, 3.1운동길, (신)제일교회, 선교사 묘역,
청라언덕, 달성공원을 답사하면서 대구광역시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인물을 조명했다.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절망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문인들은 힘을 모은다.
문학동인지 창간이 그것이다.
창조(1919년 창간), 개벽(1920년 창간), 백조(1922년 창간), 조선문단(1924년 창간)...
이상화는 박영희, 김억, 박종화, 황석우, 오상순, 홍사용 등과 더불어 1920년대 초에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들은 자유가 차단된 상황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과 죽음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삶을 찾으려 했다.
동경에서 공부하던 이상화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동포들이 살상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교)의 교사가 된다.
사회적 책무를 느낀 그는 1926년 <개벽>지에 식민지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 편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이후 백조 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시에서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나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쓴다.
1927년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고, 독립운동 혐의로 몇 차례 감옥생활을 하다가
1943년 43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이다.
다만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상화를 따르던 시인 임화(林和)가 시집 출판을 위해 원고를 가져갔으나
해방 후 월북, 사형 당했으므로 원고는 찾을 길이 없다.
이상화 고택
시인 이상화가 세상을 떠나기 전 4년간 살았던 집이다.
주변 재개발로 철거될 운명이었으나
대구 시민 5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모금액 8600만원을 들고 대구시청을 찾아가자
2006년 고택 주변을 구입한 건설사가 상화 고택을 대구시에 기증하여 이 집을 살릴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이상화 시인이 심었다는 석류나무가 반긴다.
마당 한 옆에는 화강암에 새긴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고택 내부
이상화 시인의 흉상이 있는 대청
시인이 운명할 때까지 기거하던 방
마당을 가득 채운 문학 기행 회원들
이상화 고택 가는 길
(2010.02.25. 문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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