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포에서 검찰사 이규원의 각석문을 찾다.
울릉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 시대부터 나타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옥저의 기로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 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닿았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이 시기에 울릉도에는 우산국이 세워졌다. 우산국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도 교류했으며 대마도와는 혼인 동맹을 맺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하지만 512년에 우해왕이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패전해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울릉도 사람에게 작위를 내렸으며, 11세기 초에 여진족의 침략으로 울릉도의 인구가 줄자 고려의 조정에서는 꾸준히 사람을 보내 관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가 울릉도를 약탈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다고 우려하여 태종 17년(1417)에 울릉도를 비우기로 결정한다. 울릉도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고, 울릉도에 주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순찰하는 수토(守土)정책을 폈다.
1876년 개항 이후부터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 나무를 베어 가거나 고기잡이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울릉도를 순시하고 온 관리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고종은 1881년에 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하여 울릉도 개척을 위한 사전 조사를 했다. 이규원 일행의 기록에는 조선인 141명, 일본인 78명이 있었으며, 일본인은 울릉도의 나무를 베어가기 위해 울릉도에 머물던 사람들이다. 이규원은 울릉도를 조사하면서 기록한 검찰일기를 조정에 복명하며 더 이상의 수토 정책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듬해인 1882년에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한다.1983년에 개척민들이 울릉도에 이주하여 태하나 현포 주변에 정착하였다.
학포는 태하보다 규모가 작고, 황토가 많아 소 황토구미라고 하고, 마을 뒷산에 학이 앉아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 학포라고 한다. 학포는 검찰사 이규원이 1881년 4월 30일에 배 3척에 수행원 102명을 이끌고 울릉도에 처음 도착한 마을이다. 학포 해변 바위 절벽에는 검찰사 이규원이 이 섬에 머물 당시에 울릉도 개척 역사를 새겨놓은 '임오명 각석문'이 남아있다.
학포 해안
학포
해풍 살랑이는 정자에서 꿀맛 같은 午睡
임오명 각석문
조선 고종 19년(1882)에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에 파견되었을 때 바위에 새긴 글.
당산 숲 원시림
숲을 보았으니 바다로 가자.
프레임에 꽃밭을 걸치고 바다를 담자.
꽃과 바다. 바닷가 절벽 위 민가에 해국이 가득하다.
애초에 우리가 하룻밤 묵으려던 집이다.
물비단을 길어올리는 직녀
해풍에 자연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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